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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 세상과 충돌하는 복된 삶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8복의 삶을 살아가면, 세상과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8복의 가르침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상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지만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이렇게 세상의 가치관을 거슬러 살아가면 세상은 우리를 향해 야유를 보내게 된다.


📖 박해, 이해하기 어려운 복

8복의 마지막 가르침은 매우 급진적이다. 바로 ‘박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박해’와 ‘복’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함께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마치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참 행복하시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 박해의 원인, 나에게 있는가?

우리가 받는 어려움이 모두 거룩한 박해는 아닐 수 있기에, 그 원인이 무엇인지 먼저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학자 리처드 마우는 그의 책 『무례한 기독교』에서 비기독교 사회 속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교양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하고 배타적인 모습으로 비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랑과 품위를 가지고 상대를 존중하며 예의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 나의 잘못이나 미성숙함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의를 위한 박해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무례한 기독교


📖 빛과 어둠의 필연적 갈등

그러나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더라도 박해는 찾아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국 박해를 받다 순교의 길을 걸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도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사실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박해를 당하셨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 그분의 가르침 자체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예수를 미워했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우리 또한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은 이를 빛과 어둠의 관계로 설명한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면 세상의 핍박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만약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예수를 바르게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되며, 참된 신자됨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 14:22)


📖 핍박 없는 신앙의 위험성

오히려 핍박이 전혀 없는 안일한 신앙 환경이 우리에게는 더 큰 위험일 수 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 오히려 더 순수하게 꽃을 피웠다. 마치 잡초가 밟힐수록 더 강하게 자라나는 것과 같다. 그 안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복음의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시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회적인 불이익을 넘어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시대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앙을 가장하는 ‘가짜 그리스도인’이 존재할 수 없었다.


📖 타협이냐, 믿음이냐

핍박은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할 때 찾아온다. 때로는 우리의 생존권과도 직결될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야 할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세상과 담을 쌓고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 사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내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드러내고, 복음의 능력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진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을 감추고 살기란 어려울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를 원하게 된다.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태복음 5:12) 박해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이 말씀은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운 명령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약속의 말씀이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를 이끌어온 힘이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복음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쁘게 여겼다. (사도행전 5:41) 물론 박해와 고난 그 자체를 즐거워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박해 후에 받게 될 하늘의 상이 이 땅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17)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8)


✨ 결론: 안일함과 싸우는 신앙

오늘날 한국교회는 믿음의 선조들이 흘린 피의 대가 위에 서 있다.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직접적인 박해보다 신앙의 ‘안일함’과 싸워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편안함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무뎌지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8복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치열한 영적 싸움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 오디오로 정리하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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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묵상 Q&A

Q1. 8복의 삶을 살면 왜 세상과 충돌하게 되는가?
A1. 8복의 가르침은 자신을 높이고 채우려는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되기 때문이다.

Q2. 우리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가장 먼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A2. 그 어려움이 의를 위한 박해인지, 아니면 나의 미성숙함이나 무례함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Q3. 그리스도인에게 박해가 필연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A3. 세상이 빛이신 예수님을 미워했듯이, 빛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Q4.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 왜 신자됨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A4.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바르게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역설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Q5. 핍박이 없는 안일한 신앙 환경이 더 위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A5. 신앙의 긴장감을 잃고 세상과 타협하기 쉬워지며, 믿음의 순수성과 생명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Q6. 박해를 피하기 위해 세상과 격리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가?
A6.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들어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

Q7. 박해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A7. 고난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 받게 될 하늘의 상이 이 땅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영원함을 믿기 때문이다.

Q8.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이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는가?
A8. 장차 나타날 영광과 하늘의 상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Q9.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이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은 무엇인가?
A9. 외부의 직접적인 박해보다는, 편안함 속에서 믿음이 무뎌지는 ‘안일함’이다.

Q10.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는 무엇인가?
A10. 믿음의 선조들을 기억하며 안일함에서 벗어나, 8복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치열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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